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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9. 19世 〉30. <부정공>학생공휘우겸묘표(學生公諱友謙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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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부정공>담헌공휘진룡묘갈명(湛軒公諱鎭龍墓碣銘)
湛軒公諱鎭龍墓碣銘 鼎鐺且有耳豈不聞湛軒趙公好行其德春風四面騰於謠誦竊嘗以是而究其實行則寒者衣飢者食病者藥自西自東自南自北襁負其子而至近者樂其惠遠者慕其風罔不謳歌稱賞吁盛矣公嘗言天下爲一家萬物如一身固不可及爾來者何拒即此而覷見其實心盖其施之人者本諸身天稟孝友志體之養幾幾乎生致樂病致憂喪致哀祭致敬而事兄如嚴父恆衣食必先兄而後己夜必族寢而退老白首無替湛樂有齊詩以見志士友多和之嘗見吾先子和韻欽賞盖舊矣闡先烈褒命不遲追先墓儀物畢備篤於人倫公是耳嘗荒年興役非爲侈屋意在濟溺飢戶斗粟佩其德惠墓木無羔又見公實施攸及也掠美市恩亦所不屑屢尼鄕士之薦一擧不利遂斷進取意得意士友示汲引深恥別徑所樂良辰美景挈朋儔娛文酒以終其老結齋庤粮以待來讀多所成就彼營營逐臭不得半日閒偏愛私藏視文行如弁髦者亦足羞也公諱鎭龍字汶汝玉川氏檢校侍中璋其肇祖府院君元吉錄定策勳副正瑜麗季罔僕節愍公崇文莊陵末與子哲山同死六臣父 贈正卿子敎官寔公十世已上祖通德郞東昌祖顯龜考基信著孝行妣濟州梁氏父命輔本生其孝於所後同産妣前興德張氏後海州崔氏公生 純祖癸亥享年五十八卒 哲宗庚申十月二十七日葬昇平之漾碧亭上丁癸之原夫人豊川盧氏光鼎女後公圽合封四男善浩珪浩兌浩璉浩星州李仁淳安德洙婿也長房生秉斗秉文秉周李秉權朴埈植妻二房生秉準秉仁秉祚三房生秉哲崔東翼李鍾承妻季房生秉年柳璿妻公族孫韋堂章燮狀其德族姪石汀寅錫識其幽秉文使冡姪淇煥方伐石備儀走江上病廬徵爲銘二文皆信筆參以雷灌於平日者而爲之銘曰玉川之趙肇自侍中忠獻裂土副正旌忠節愍義烈六臣與同而雲而仍菀有世風湛軒式生志行俱隆本立孝弟德惠兼崇孰飢我歸有公自南自北自西自東君實有頌騰于兒童儲書待來鼹河各充不屑捷徑處士以終漾碧之阡式鞠我躬 幸州 奇宇萬 撰 담헌공휘진룡묘갈명(湛軒公諱鎭龍墓碣銘) 솥과 냄비도 또한 귀가있는데 사람 으로써 어찌 담헌(湛軒) 조공(趙公)의 좋은 행의와 그덕을 듣지 못하였으리오、 四면이 모두 봄 바람 이로다。 하는 성문(聲聞)이 노래와 송사(頌辭)에 올랐도다。 내가 일찍 이로써 그 실행(實行)을 구명(究明)한 즉 추운자는 입히고 주린 자는 먹이며、 병든 자는 약을 주니、 동서남북(東西南北)으로부터 그 자식을 포대기에 싸서 업고 이르러 가까운 자는 그 은혜를 기뻐하고 먼 자는 그 풍성(風聲)을 흠모하여 소리 낮추어 칭송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감탄하고 성대한 일이로다。 공이 일찍 천하(天下)로 한 집을 삼고、 만물(萬物)를 한 몸같이 하는 것은 진실로 가히 미치지 못하겠지만 오는 자를 어찌 막을 것인가 하고 말하였으니 이제 이로써 그 진심을 엿보겠으며、 대개 사람을 구제한 것은 어진 마음의 발현인 것이다。 천성이 효우하여 뜻과 몸을 봉양함이 자못 생전에는 화락하고、 병환때는 근심하며 초상에 슬퍼하고 제사때 공경하며、 형 섬김을 엄부(嚴父) 같이 하여 항상 의식(衣食)을 반드시 형에게 먼저하고 자기를 뒤에 하며、 밤에는 반드시 모여자고 물러가기를 늙어 백수(白首)가 되도록 변치 아니하고 담낙재를 세우고 시를 지어 써 뜻을 보이니 사우(士友)가 많이 화답하고 일찍 나의 선자(先子)가 화답한 시를 보니 옛 일이 새로와 공경하고 감상하였다。 선렬(先烈)을 천양(闡揚) 하매 총포(寵褒)가 더디지 않고、 선영(先塋)을 추모하여 석물을 다 갖추며 인륜에 독실하는 공이시었다。 일찍 흉년에 역사를 일으킨 것은 집을 사치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뜻이 약한 자를 구제 하는데 있었고 주린 집에 곡식을 준것은 그 덕과 은혜로운 마음에 따른 것이며、 묘목(墓木)이 무양(無恙)하니 또 공의 덕의(德義)가 미친 바를 보겠도다。 아름다움을 탐하고 은혜를 파는 것은 또한 경시(輕視)한 바요、 자주 고을 선비의 추천을 받았으나 한번 나가 불이하매 마침내 친취할 뜻을 끊고 뜻 맞는 사우(士友)의 출세를 도우며、 부정한 방법으로 진취하는 것을 무척 부끄러워 하였다。 좋아한 바는 맑을 때와 아름다운 경치에 벗을 이끌고 글과 술을 즐기며 이로써 그 늙은 시절을 마치고 서재를 지어 양식을 싸고 써 배우러 온 자를 기다려 성취한 바 많으며、 저 파리같이 앙앙거리며 내음을 좇아 반일한(半日閒)도 얻지 못하고 편벽되게 사사로이 감춘 것을 사랑하고 문학과 행의를 변모(弁髦無用物)같이 보는 자를 또한 족히 부끄러워 하였다。 공의 휘는 진룡(鎭龍)이요 자는 문여(汶汝)이며 옥천인 인데 절민공 휘 승문(崇文)의 후손으로 고(考) 기신(基信)은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고、 비(妣)는 제주 양씨(濟州梁氏) 명보녀(父命輔)였다。 본생 고는 소생 고와 형제요、 전비(前妣)는 흥덕 장씨(前興德張)요 후(後)는 해주 최씨(海州崔氏)였다。 공은 순조(純祖) 계해(一八○三)년에 출생하여 향년 五十八세로 철종(哲宗) 경신(庚申)년 十월 二十七일에 별세하니、 승평 양벽 정상 정계지원(昇平漾碧亭上丁癸之原)에 안장하고 배는 풍천 노씨(豊川盧氏) 광정녀(光鼎女)로 공 뒤에 별세하여 합봉하였다。 남(男)은 선호(善浩)·규호(珪浩)·태호(兌浩)·연호(璉浩)요 녀(女)는 이 인순(李仁淳)·안 덕수(安德洙)처였다。 병두(秉斗)·병문(秉文)·병주(秉周) 이 병권(李秉權)·박 준식(朴埈植)의 처는 장방출이요 병준(秉準)·병인(秉仁)·병조(秉祚)는 二방출이며 병철(秉哲) 최 동익(崔東翼)·이 종승(李鍾承)의 처는 三방출이고 병년(秉年)·유선(柳璿)의 처는 계방출이었다。 공의 족손 위당 장섭(族孫韋堂章燮)이 그 행장을 쓰고 족질 석정(石汀)·인석(寅錫)이 그 묘지를 기록 하였는데 병문(秉文)이 장질 기환(淇煥)으로 하여금 바야흐로 돌을 깎아 의물(儀物)을 갖추고 강상병여(江上病廬)에 다다라 명문을 청하매 두 글이 다 신필(信筆)이요 평일에 우뢰같이 성화를 들은 바라 새겨 가로되 옥천의 조는 시중으로부터 비롯하여(玉川之趙肇自侍中) 충헌이 의리를 뽑내고 부정이 충절로 정표하였네(忠獻裂土副正旌忠) 절민 의열은 六신과 같으며(節愍義烈六臣與同) 많은 후손에 울연한 세풍이 있고(而雲而仍菀有世風) 담헌이 이에 나서 지조와 행의가 함께 높았네(湛軒式生志行俱隆) 근본을 효제로 세우고 덕과 은혜가 같이 밝았도다(本立孝弟德惠兼崇) 동서남북에서 모여드니(自南自北自西自東) 그대를 위한 송가는 아이들 입에서 오르내리네(君實有頌騰于兒童) 책을 싸두고 오는 자를 기다리니 학식을 각기 채웠네(儲書待來鼹河各充) 지름길을 가볍게 보고 처사로써 마치었다。 (不屑捷徑處士以終) 양벽의 묘도에서 내 몸을 구부린다(漾碧之阡式鞠我躬) 행주(幸州) 기우만(奇宇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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